메타의 글로벌 비즈니스 마케팅 동북아시아 총괄 서은아 상무는 매 순간 자신과 팀원을 신뢰하고 최선을 다해 일한다. 그것이 거듭되는 실패와 불안 속에서도 커리어 패스를 성공적으로 이끈 동력이다.
디지털 광고대행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셨더라고요. 대형 광고대행사를 선택하셨을 법도 한데요.
정확히는 두 곳 모두 합격했고 ‘어느 쪽을 가야 할까?’ 고민한 게 제 첫 직업적 선택이었어요. 졸업할 즈음에 IMF가 터지면서 교환학생 계획이 무산되었고 광고, 마케팅 실무를 배울 수 있는 아카데미를 다녔거든요. 현업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수업을 듣다 보니 하루빨리 일을 손에 쥐고 싶었어요. 첫 직장은 작은 디지털 광고대행사였는데 ‘대형 광고대행사 맞은편에 위치한 회사’를 내세워 채용광고를 진행했을 정도였죠. 대형 회사에는 광고, 마케팅 일을 몇 십 년씩 하신 분들이 많으니까, ‘입사 후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반대로 당시 디지털 광고는 20~30년씩 광고를 하신 분들도 잘 모르는 영역이었거든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배워 곧잘 다뤘던 제가 선배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출발할 수 있겠다고 판단해 입사했죠.
당시에 꽤나 용감한 선택이었을 것 같아요.
대형 광고 회사에 비해 연봉도 3분의 1밖에 안되었고 제게 어떤 리스크가 주어질지 알 수 없는 때였죠. 빨리 성공하고 싶었어요. 입신양명의 꿈이 컸죠.(웃음) 저는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했는데요. 당시에 대기업 채용설명회가 열리면 부전공이나 그에 준하는 수업, 아카데미를 수강했음에도 담당자가 제 서류는 보지도 않았어요. “상경계열만 뽑고요. 여자는 안 뽑아요”와 같은 거절이 만연했죠. 딸 셋의 집에서 첫째 딸로 자랐지만 살면서 남녀차별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앞으로 일하면서 제게 그런 불합리한 상황이 자주 펼쳐질 거라 직감했어요. 그래서 더욱 제 선택이 맞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불안정한 미래, 더 불안정한 조직에 몸을 담근 채 자신을 증명하는 게 쉽진 않잖아요.
맞아요. 불안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죠. 탄탄대로, 호시절이었다고 말하는 때의 사람들도 미래는 불안했을 거예요.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밝으니까 제가 스트레스나 긴장을 못 느낄 거라 예상하시는데요. 저 역시 제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사람이라 늘 불안해요. 그래서 더욱 선택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바라봐야 하죠. 저는 불안, 긴장의 상황이 무척 건강하다고 봐요. 그만큼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상무님의 사회 초년생 시절은 어떠셨어요?
겁 없이 어떤 일이든 뛰어들었어요. 제가 어릴 때 공부를 잘했거든요? (웃음) 전국 3%의 삶을 살았어요. 성적을 통해 제가 어느 층위에 있다는 걸 매번 확인할 수 있었죠. 근데 사회에 나오는 순간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더라고요. 바닥부터 올라가야 했죠. 근데 동시에 지금 망해야 잃을 게 제일 적다는 것도 알았어요. 마흔이 넘어 망하면 돌이킬 수가 어려울 것 같았어요. 좌절하고 일어나는 걸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시기였죠. 더 많이 무모하고 더 많은 용기를 내고 더 많이 실패해야 한다는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섯 번의 이직을 하셨어요. 개인적으로는 조직에서의 관계, 적응, 실적 등 성공보다 실패가 이직의 요인이었어요. 상무님은요?
저는 이직하는 사람들을 무척 응원해요. 이직은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기 위한 결단이에요. 제가 무모하게 선택했던 첫 회사는 벤처 붐이 일던 때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도전, 투자하다가 망했어요. 월급을 6개월치 못 받았고 책상을 비롯한 회사 기물이 팔리는 모습까지 봐야 했죠. 이후에 친구 아버지 회사 일을 도와주기 위해 캐나다에 갈 준비를 했는데, 비행을 하루 앞둔 날 9.11 테러가 터지면서 몇 개월간 일정이 보류되었어요. 뒤늦게 캐나다에 갔을 때는 프로젝트가 모두 끝나버렸고 저는 또 다시 일을 잃었죠. 무척 우울하고 바닥을 기던 시기였어요. 하릴없이 캐나다에 머물렀어요. 어느 날 매일 가는 식당 할머니께서 컴퓨터 좀 고쳐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어린 외국 애가 와서 돈도 없이 쩔쩔매면서 있으니까 용돈이나 쥐여 주실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고쳐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시면서 옆집 할아버지 컴퓨터도 고쳐달라고 하시더라고요. 할 일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 하나가 제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어요. 한국에 돌아가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열심히 일할 생각이었죠. 근데 다음 회사에선 어려운 상사를 만나서 매일 울었어요. 저 역시 이직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기도, 도망이기도 했어요. 종종 사람들이 ‘내가 조직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이직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잖아요. 근데 때론 도망도 최선의 선택이에요.
메타로의 이직은 조금 다른 차원의 이유였다고 들었어요.
마흔이 넘었을 무렵이었어요. 당시에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했는데 제가 일을 통해 만나는 후배, 대학생들이 제 자리를 커리어 종착지로 이야기하더라고요. 이제야 커리어에 필요한 무기들을 장착하고 본판에 입장하려는데 친구들은 자꾸 마지막 게임인 듯 말했어요. “이사님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같은 질문을 하곤 했죠. 그 즈음 우연히 미국 출장을 끝내고 휴가를 써서 아이와 같이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갔다가 페이스북 캠퍼스 투어를 하게 되었어요. 페이스북을 워낙 즐겨 사용한 터라 마크 주커버그란 사람에 대해 궁금했고 같이 일해보고 싶었거든요. 또 셰릴 샌드버그의 책을 읽으면서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받았던 차별의 순간을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배우기도 했었고요. 페이스북 캠퍼스에 입장하니까 너무 설레는데 참았어요. 그래도 ‘마이크로소프트 이사인데’ 싶어서 이를 꽉 깨물었죠.(웃음) 근데 페이스북 계정도 없는 딸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여기가 왜 그렇게 좋아?” 물었더니 아이가 “그냥 좋으면 좋은 거지 엄마는 왜 자꾸 물어”라고 잘라 말하더라고요. 그때 저는 ‘이 회사로 이직하면 내 직급은 어떻게 될까?’, ‘연봉은?’, ‘지금 사람 뽑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더하기 빼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아이의 말에 머리를 탁 맞은 듯했어요. 모르는 미래의 선택은 무조건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간 열망을 통해 이직한 적이 있던가? 싶었죠. 캠퍼스 밖을 나오면서 저희를 에스코트한 직원에게 “샌프란시스코에 다시 돌아올 땐 이곳의 직원으로 돌아올게요”라고 인사를 했어요. 결국 6개월의 긴 인터뷰를 거쳐서 메타로 이직했어요.
상무님은 어떤 동료, 브랜드와 일하고 싶으세요?
늘 하나의 특징을 꼬집어 말하기 어려워했어요. 저는 다양성을 좋아하거든요. 근데 요새 공통점을 찾은 것 같아요. 호기심이 많은 사람,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크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답을 구하는 사람이 좋아요. 마케터는 많은 질문을 가진 사람이자 대답하는 근육을 가진 사람이어야 해요.
리추얼 플랫폼 밑미에서 <매일의 영감 수집>도 운영 중이시잖아요.
맞아요. 3년째 모임을 하고 있는데 이곳은 이미 이러한 부분이 증명된 사람들이 모인 듯해요.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자신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거니까. 백만장자가 아니라 어제보다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걸 꿈꾸죠. 리추얼 모임 <매일의 영감 수집>에서는 특별한 강의나 어려운 미션이 주어지지 않아요. 그저 하루 20분 자신의 영감 조각을 모으고 생각을 기록해요. 코로나19가 터지고 모임이 시작했어요. 다들 경험 빈곤 시대에 답답함을 느끼던 즈음이었는데 문득 ‘하루 24시간을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진짜 삶의 자극이 없다고?’ 궁금증이 생겼어요. 그 물음표에 답하고자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기 시작했죠. 큰 종이에 그날 받은 택배 송장부터 영수증, 배달음식에 붙은 스티커 하나하나까지 붙였어요. 하루는 편의점 CU 영수증을 붙이는데, 종이 상단에 “CU again” 글귀를 발견했어요. CU에 들어설 때 “Nice to CU” 문구는 많이들 봤을 거예요.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문밖을 나서 영수증을 다시금 순간까지 브랜딩은 계속되었던 거죠. 이런 작은 곳에서 영감과 자극을 얻어요.
자신의 성장을 게을리하지 않고 리더, 리추얼 메이커, 엄마 등 다양한 정체성 역시 최선을 다해 살고 계시잖아요. 시간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제 아웃룩에는 30분 단위로 하루의 모든 일과가 정리되어 있어요. 자는 시간까지요. 그리곤 제 아웃룩을 모든 팀원에게 공유하죠. 저는 데일리, 위클리 등 다이어리를 여러 개 사용하며 시간을 굉장히 길게 봐요. 특히 일주일 단위가 중요하죠. 모든 일의 밸런스가 중요하거든요. 루틴 역시 명확하게 세우는 편이에요. 월요일은 재택, 화요일은 롱 런치 미팅, 수요일은 1 대 1 미팅 식으로 요일마다 하는 일이 정해져 있어요. 주 2회 저녁 8~10시에 아이 영어학원을 데려다주는데 저는 학원 맞은편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요. 밤 10시부터 12시까지는 리추얼 모임 멤버들을 위해 책상에 앉아 줌을 켜고요. 매달 인터뷰, 강연은 1-2개 내외만 하려고 하고, 매년 프로젝트로 미친 듯 바쁜 3주가 있는데 그게 끝나면 바로 2주간 휴가를 내요. 이게 25년의 커리어 중 20년 이상 지켜온 루틴이죠.
이렇게 명확하게 시간 계획을 세우고 루틴을 만든 이유가 궁금해요.
효율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는 건 당연하고요. 제시간을 투명하고 명확하게 보여줘서 팀원들에게 예측 가능성을 줘요. 또 제시간 리듬에 팀원들이 올라타서 함께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죠. 아이는 ‘오늘 엄마가 야근을 하나, 안 하나’ 걱정하지 않게 되고요. 시간 관리가 잘 돼야 예외 상황이 생겨도 훨씬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갈 만큼 우선순위의 친구들이 있어요. 회사 내 인턴 그룹. 제 똥강아지들인데. (웃음) 한두 달 전에 저와 약속을 잡지 않아도 ‘오늘 회사에 어려운 일이 있었어요’라는 친구들의 메시지 하나면 무조건 달려가요.
어려운 직장 상사보다 언제든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따뜻한 선배의 모습이네요. 상무님께서 생각하는 좋은 리더는 어떤 모습인가요?
어릴 적에 시험을 잘 보고 돌아와도, 동생들 점수가 안 좋으면 아버지께 혼나곤 했어요. 아버지는 ‘혼자 잘하지 말아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 땐 참 억울했죠. 근데 자연스럽게 ‘같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배우게 되었어요. 리더는 대단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도 한 해가 지나면 2학년이 되면서 1학년 동생들을 맞이하고 앞선 자리에 서요. 그게 리더가 되는 순간이라 생각해요. 우리 모두는 리더예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리더는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잘 안아주고 그를 통해 조직이 안정감을 느끼며 동시에 성장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사람이에요. 저 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팀원과 일할 때도 많았어요. 어릴 때는 이해의 폭이 좁아서 제 생각을 관철시키고 설득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저와 다른 친구들에게 훨씬 많이 물어요. 그 친구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고민했을 테니까요. 제가 알고 고민한 것들이 답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은 시대에 살고 있어요. 매일매일 다른 기술, 솔루션이 등장해 작년의 풀었던 문제의 답이 올해는 아닌 경우가 많죠. 우선 경청하고자 해요. 그리고 ‘팀원들에게 이곳에선 무슨 일을 해도 좋다, 여기가 나의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마음을 느끼게 하고 싶어요.
, 메타 서은아 상무 님에게 물었습니다!
🔍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즐겨 찾는 사이트 또는 인스타그램 계정은?
주머니를 털어 오늘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봅니다. 가방 속 영수증, 메모를 시작으로 오늘 갔던 카페, 쿠팡에서 구입한 물건 하나하나까지 들여다보아요. 모든 조각 속에서 영감을 길러내고 발견해 키우는 연습을 합니다.
🔍하루 평균 인스타그램 또는 타 SNS 사용 시간은?
3시간.
🔍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앱 3개는?
인스타그램, 사진 편집 어플 다크룸, 카메라. 사진 찍는 걸 엄청 좋아해서 1년에 10만장 가량 촬영하는 듯해요. 휴대폰 용량도 1테라로 사용합니다. 하하.
Freelance Editor 유승현
Photo 개인 제공
메타의 글로벌 비즈니스 마케팅 동북아시아 총괄 서은아 상무는 매 순간 자신과 팀원을 신뢰하고 최선을 다해 일한다. 그것이 거듭되는 실패와 불안 속에서도 커리어 패스를 성공적으로 이끈 동력이다.
디지털 광고대행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셨더라고요. 대형 광고대행사를 선택하셨을 법도 한데요.
정확히는 두 곳 모두 합격했고 ‘어느 쪽을 가야 할까?’ 고민한 게 제 첫 직업적 선택이었어요. 졸업할 즈음에 IMF가 터지면서 교환학생 계획이 무산되었고 광고, 마케팅 실무를 배울 수 있는 아카데미를 다녔거든요. 현업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수업을 듣다 보니 하루빨리 일을 손에 쥐고 싶었어요. 첫 직장은 작은 디지털 광고대행사였는데 ‘대형 광고대행사 맞은편에 위치한 회사’를 내세워 채용광고를 진행했을 정도였죠. 대형 회사에는 광고, 마케팅 일을 몇 십 년씩 하신 분들이 많으니까, ‘입사 후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반대로 당시 디지털 광고는 20~30년씩 광고를 하신 분들도 잘 모르는 영역이었거든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배워 곧잘 다뤘던 제가 선배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출발할 수 있겠다고 판단해 입사했죠.
당시에 꽤나 용감한 선택이었을 것 같아요.
대형 광고 회사에 비해 연봉도 3분의 1밖에 안되었고 제게 어떤 리스크가 주어질지 알 수 없는 때였죠. 빨리 성공하고 싶었어요. 입신양명의 꿈이 컸죠.(웃음) 저는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했는데요. 당시에 대기업 채용설명회가 열리면 부전공이나 그에 준하는 수업, 아카데미를 수강했음에도 담당자가 제 서류는 보지도 않았어요. “상경계열만 뽑고요. 여자는 안 뽑아요”와 같은 거절이 만연했죠. 딸 셋의 집에서 첫째 딸로 자랐지만 살면서 남녀차별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앞으로 일하면서 제게 그런 불합리한 상황이 자주 펼쳐질 거라 직감했어요. 그래서 더욱 제 선택이 맞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불안정한 미래, 더 불안정한 조직에 몸을 담근 채 자신을 증명하는 게 쉽진 않잖아요.
맞아요. 불안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죠. 탄탄대로, 호시절이었다고 말하는 때의 사람들도 미래는 불안했을 거예요.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밝으니까 제가 스트레스나 긴장을 못 느낄 거라 예상하시는데요. 저 역시 제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사람이라 늘 불안해요. 그래서 더욱 선택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바라봐야 하죠. 저는 불안, 긴장의 상황이 무척 건강하다고 봐요. 그만큼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상무님의 사회 초년생 시절은 어떠셨어요?
겁 없이 어떤 일이든 뛰어들었어요. 제가 어릴 때 공부를 잘했거든요? (웃음) 전국 3%의 삶을 살았어요. 성적을 통해 제가 어느 층위에 있다는 걸 매번 확인할 수 있었죠. 근데 사회에 나오는 순간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더라고요. 바닥부터 올라가야 했죠. 근데 동시에 지금 망해야 잃을 게 제일 적다는 것도 알았어요. 마흔이 넘어 망하면 돌이킬 수가 어려울 것 같았어요. 좌절하고 일어나는 걸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시기였죠. 더 많이 무모하고 더 많은 용기를 내고 더 많이 실패해야 한다는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섯 번의 이직을 하셨어요. 개인적으로는 조직에서의 관계, 적응, 실적 등 성공보다 실패가 이직의 요인이었어요. 상무님은요?
저는 이직하는 사람들을 무척 응원해요. 이직은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기 위한 결단이에요. 제가 무모하게 선택했던 첫 회사는 벤처 붐이 일던 때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도전, 투자하다가 망했어요. 월급을 6개월치 못 받았고 책상을 비롯한 회사 기물이 팔리는 모습까지 봐야 했죠. 이후에 친구 아버지 회사 일을 도와주기 위해 캐나다에 갈 준비를 했는데, 비행을 하루 앞둔 날 9.11 테러가 터지면서 몇 개월간 일정이 보류되었어요. 뒤늦게 캐나다에 갔을 때는 프로젝트가 모두 끝나버렸고 저는 또 다시 일을 잃었죠. 무척 우울하고 바닥을 기던 시기였어요. 하릴없이 캐나다에 머물렀어요. 어느 날 매일 가는 식당 할머니께서 컴퓨터 좀 고쳐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어린 외국 애가 와서 돈도 없이 쩔쩔매면서 있으니까 용돈이나 쥐여 주실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고쳐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시면서 옆집 할아버지 컴퓨터도 고쳐달라고 하시더라고요. 할 일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 하나가 제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어요. 한국에 돌아가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열심히 일할 생각이었죠. 근데 다음 회사에선 어려운 상사를 만나서 매일 울었어요. 저 역시 이직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기도, 도망이기도 했어요. 종종 사람들이 ‘내가 조직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이직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잖아요. 근데 때론 도망도 최선의 선택이에요.
메타로의 이직은 조금 다른 차원의 이유였다고 들었어요.
마흔이 넘었을 무렵이었어요. 당시에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했는데 제가 일을 통해 만나는 후배, 대학생들이 제 자리를 커리어 종착지로 이야기하더라고요. 이제야 커리어에 필요한 무기들을 장착하고 본판에 입장하려는데 친구들은 자꾸 마지막 게임인 듯 말했어요. “이사님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같은 질문을 하곤 했죠. 그 즈음 우연히 미국 출장을 끝내고 휴가를 써서 아이와 같이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갔다가 페이스북 캠퍼스 투어를 하게 되었어요. 페이스북을 워낙 즐겨 사용한 터라 마크 주커버그란 사람에 대해 궁금했고 같이 일해보고 싶었거든요. 또 셰릴 샌드버그의 책을 읽으면서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받았던 차별의 순간을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배우기도 했었고요. 페이스북 캠퍼스에 입장하니까 너무 설레는데 참았어요. 그래도 ‘마이크로소프트 이사인데’ 싶어서 이를 꽉 깨물었죠.(웃음) 근데 페이스북 계정도 없는 딸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여기가 왜 그렇게 좋아?” 물었더니 아이가 “그냥 좋으면 좋은 거지 엄마는 왜 자꾸 물어”라고 잘라 말하더라고요. 그때 저는 ‘이 회사로 이직하면 내 직급은 어떻게 될까?’, ‘연봉은?’, ‘지금 사람 뽑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더하기 빼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아이의 말에 머리를 탁 맞은 듯했어요. 모르는 미래의 선택은 무조건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간 열망을 통해 이직한 적이 있던가? 싶었죠. 캠퍼스 밖을 나오면서 저희를 에스코트한 직원에게 “샌프란시스코에 다시 돌아올 땐 이곳의 직원으로 돌아올게요”라고 인사를 했어요. 결국 6개월의 긴 인터뷰를 거쳐서 메타로 이직했어요.
상무님은 어떤 동료, 브랜드와 일하고 싶으세요?
늘 하나의 특징을 꼬집어 말하기 어려워했어요. 저는 다양성을 좋아하거든요. 근데 요새 공통점을 찾은 것 같아요. 호기심이 많은 사람,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크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답을 구하는 사람이 좋아요. 마케터는 많은 질문을 가진 사람이자 대답하는 근육을 가진 사람이어야 해요.
리추얼 플랫폼 밑미에서 <매일의 영감 수집>도 운영 중이시잖아요.
맞아요. 3년째 모임을 하고 있는데 이곳은 이미 이러한 부분이 증명된 사람들이 모인 듯해요.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자신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거니까. 백만장자가 아니라 어제보다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걸 꿈꾸죠. 리추얼 모임 <매일의 영감 수집>에서는 특별한 강의나 어려운 미션이 주어지지 않아요. 그저 하루 20분 자신의 영감 조각을 모으고 생각을 기록해요. 코로나19가 터지고 모임이 시작했어요. 다들 경험 빈곤 시대에 답답함을 느끼던 즈음이었는데 문득 ‘하루 24시간을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진짜 삶의 자극이 없다고?’ 궁금증이 생겼어요. 그 물음표에 답하고자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기 시작했죠. 큰 종이에 그날 받은 택배 송장부터 영수증, 배달음식에 붙은 스티커 하나하나까지 붙였어요. 하루는 편의점 CU 영수증을 붙이는데, 종이 상단에 “CU again” 글귀를 발견했어요. CU에 들어설 때 “Nice to CU” 문구는 많이들 봤을 거예요.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문밖을 나서 영수증을 다시금 순간까지 브랜딩은 계속되었던 거죠. 이런 작은 곳에서 영감과 자극을 얻어요.
자신의 성장을 게을리하지 않고 리더, 리추얼 메이커, 엄마 등 다양한 정체성 역시 최선을 다해 살고 계시잖아요. 시간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제 아웃룩에는 30분 단위로 하루의 모든 일과가 정리되어 있어요. 자는 시간까지요. 그리곤 제 아웃룩을 모든 팀원에게 공유하죠. 저는 데일리, 위클리 등 다이어리를 여러 개 사용하며 시간을 굉장히 길게 봐요. 특히 일주일 단위가 중요하죠. 모든 일의 밸런스가 중요하거든요. 루틴 역시 명확하게 세우는 편이에요. 월요일은 재택, 화요일은 롱 런치 미팅, 수요일은 1 대 1 미팅 식으로 요일마다 하는 일이 정해져 있어요. 주 2회 저녁 8~10시에 아이 영어학원을 데려다주는데 저는 학원 맞은편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요. 밤 10시부터 12시까지는 리추얼 모임 멤버들을 위해 책상에 앉아 줌을 켜고요. 매달 인터뷰, 강연은 1-2개 내외만 하려고 하고, 매년 프로젝트로 미친 듯 바쁜 3주가 있는데 그게 끝나면 바로 2주간 휴가를 내요. 이게 25년의 커리어 중 20년 이상 지켜온 루틴이죠.
이렇게 명확하게 시간 계획을 세우고 루틴을 만든 이유가 궁금해요.
효율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는 건 당연하고요. 제시간을 투명하고 명확하게 보여줘서 팀원들에게 예측 가능성을 줘요. 또 제시간 리듬에 팀원들이 올라타서 함께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죠. 아이는 ‘오늘 엄마가 야근을 하나, 안 하나’ 걱정하지 않게 되고요. 시간 관리가 잘 돼야 예외 상황이 생겨도 훨씬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갈 만큼 우선순위의 친구들이 있어요. 회사 내 인턴 그룹. 제 똥강아지들인데. (웃음) 한두 달 전에 저와 약속을 잡지 않아도 ‘오늘 회사에 어려운 일이 있었어요’라는 친구들의 메시지 하나면 무조건 달려가요.
어려운 직장 상사보다 언제든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따뜻한 선배의 모습이네요. 상무님께서 생각하는 좋은 리더는 어떤 모습인가요?
어릴 적에 시험을 잘 보고 돌아와도, 동생들 점수가 안 좋으면 아버지께 혼나곤 했어요. 아버지는 ‘혼자 잘하지 말아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 땐 참 억울했죠. 근데 자연스럽게 ‘같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배우게 되었어요. 리더는 대단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도 한 해가 지나면 2학년이 되면서 1학년 동생들을 맞이하고 앞선 자리에 서요. 그게 리더가 되는 순간이라 생각해요. 우리 모두는 리더예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리더는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잘 안아주고 그를 통해 조직이 안정감을 느끼며 동시에 성장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사람이에요. 저 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팀원과 일할 때도 많았어요. 어릴 때는 이해의 폭이 좁아서 제 생각을 관철시키고 설득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저와 다른 친구들에게 훨씬 많이 물어요. 그 친구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고민했을 테니까요. 제가 알고 고민한 것들이 답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은 시대에 살고 있어요. 매일매일 다른 기술, 솔루션이 등장해 작년의 풀었던 문제의 답이 올해는 아닌 경우가 많죠. 우선 경청하고자 해요. 그리고 ‘팀원들에게 이곳에선 무슨 일을 해도 좋다, 여기가 나의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마음을 느끼게 하고 싶어요.
, 메타 서은아 상무 님에게 물었습니다!
🔍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즐겨 찾는 사이트 또는 인스타그램 계정은?
주머니를 털어 오늘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봅니다. 가방 속 영수증, 메모를 시작으로 오늘 갔던 카페, 쿠팡에서 구입한 물건 하나하나까지 들여다보아요. 모든 조각 속에서 영감을 길러내고 발견해 키우는 연습을 합니다.
🔍하루 평균 인스타그램 또는 타 SNS 사용 시간은?
3시간.
🔍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앱 3개는?
인스타그램, 사진 편집 어플 다크룸, 카메라. 사진 찍는 걸 엄청 좋아해서 1년에 10만장 가량 촬영하는 듯해요. 휴대폰 용량도 1테라로 사용합니다. 하하.
Freelance Editor 유승현
Photo 개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