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직업아트 디렉터🔍 성수동 LCDC 서울 총괄 디렉터, 김재원

오픈 첫날 1천 명이 넘는 방문객을 끌어 모은 복합 문화 공간 ‘LCDC 서울’의 총괄 디렉터 김재원.



대표님의 대학 시절은 어땠나요?

처음에는 미술품 복원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별다른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영국으로 유학 가겠다고 고집 부렸죠. 콜드플레이랑 〈트레인스포팅〉 같은 영화가 유행하던 시절이었거든요.(웃음) 부모님께서 유학 계획서를 짜 오면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하셔서 그길로 영국문화원 가서 자료 모으고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요. 막상 그때는 좀 시큰둥하시더니 한 달쯤 지나서 엄마가 제 앞에 하늘색 대한항공 봉투를 툭 던지시더라고요. 열어보니 런던행 편도 티켓이….

 

와, 부모님 너무 멋지신데요?

2주 후 출발하는 일정으로 아주 날짜까지 딱 박혀 있더라고요. 준비 기간이 길면 놀 게 뻔하니 학원이고 뭐고 얼른 가서 뭐라도 하라고. 준비할 시간도 없어, 여행 비자로 가서 현지에서 학교 알아보고 그랬어요. 막상 가보니 제가 몰랐던 디자인 관련 학과가 너무 많더라고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가 갑자기 눈앞에 엄청나게 큰 세계가 열린 거죠. 고민 끝에 텍스타일 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 후 영국에서 회사도 잠깐 다녔어요. 하지만 학교나 회사보다는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배운 게 훨씬 컸죠. 그때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면서 경험한 것들이 훗날 제게 큰 자양분이 됐어요.

 

2014년 한국에 와서 100평짜리 인쇄 공장을 개조한 카페 ‘자그마치’를 선보이며 본격적인 성수동 시대를 열었어요. 사회에 나오자마자 자기 사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실은 한국에 와서 기업 면접도 두 번 봤어요. 두 군데 모두 붙었는데 합격 전화 받고 못 가겠다고 했죠. 저는 완전 호기심 천국인 사람인데,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보니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결국 한국에서 다시 대학원까지 다녔는데, 사실 공부는 생각보다 재미없었어요. 재미가 없으니 다시 다른 영역을 기웃거리기 시작했고요. 그러다 시작한 게 ‘자그마치’예요. 카페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예술과 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거점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컸죠. 당시에는 서울에 갈 만한 카페가 별로 없었거든요. 저만 해도 맨날 홍대까지 가서 앤트러사이트나 무대륙, 이리카페 같은 곳을 전전하는 게 일상이었으니까요. 왜 내가 생활하는 동네에는 이런 카페가 없을까, 왜 멋진 공간에 가려면 늘 서쪽으로 가야 할까 싶었죠. 그때 제가 다니던 대학이 성수동 근처였거든요.

 

당시 성수동은 황량한 공장 지대에 불과했죠.

레이저 커팅을 주제로 논문을 쓰면서 성수동 일대를 자주 오갔는데, 공장들이 늘어선 풍경이 제가 살던 이스트런던을 떠올리게 했어요. 이스트런던이 원래 되게 위험하고 암울한 동네인데 예술가들이 모이면서 엄청 핫해졌잖아요. 저는 영국에서 그 과정을 다 지켜본 터라, 성수동의 가능성이 더 눈에 들어왔던 것 같아요. 대림창고의 존재도 한몫했죠. 당시에는 카페가 아니고 그냥 창고였는데 그 빨간 벽돌 건물이 주는 위엄이 대단했어요.


처음 하는 사업인데 시행착오는 없었나요?

직원 셋으로 시작했는데 내내 적자였어요. 비즈니스 관점으로 보면 완전 꽝이었죠. 전 부가세 신고가 뭔지도 몰랐어요. 작가들 초대해 전시할 때도 수수료를 받긴커녕 함께해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생각했고요. 강연이든 팝업 스토어든 저희 공간에서 벌인 행사가 잘되면 ‘와, 신난다!’ 하고 뿌듯해하기 바빴어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수업료 참 잘 냈다’ 싶어요. 그때의 경험으로 충분히 많은 걸 얻었으니까요.

 

김재원 대표가 직접 모은 ‘이페메라’들.


‘수업료’라는 인식의 전환이 상쾌하네요. 그런 철학은 언제 정립됐나요?

어려서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분수에 안 맞는 물건을 사고 마음이 우울해지면 ‘수업료 냈다고 생각하자’고 합리화하기도 하고요.(웃음) 브랜드의 가치는 하루아침에 쌓이는 게 아니잖아요. 저라는 사람을 브랜드라고 보면, 제가 세상에서 쓰는 모든 돈은 수업료인 거예요. 그런 경험이 하나둘 쌓인 덕에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더 좋은 일을 하고, 더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안목은 결국 경험에서 나오니까요.

맞아요. 예를 들어 3천원짜리 유리컵과 3만원짜리 유리컵이 있다고 쳐요. 그럴 때 후자를 그냥 ‘예쁜 쓰레기네’ 하고 넘어가는 것과 커피 몇 잔 사 마실 돈 아껴 그걸 직접 써보는 건 차이가 커요. ‘아, 이렇게 얇은 잔으로 맥주를 마시는 기분은 이런 거구나’ 하는 건 그 물건을 그냥 바라만 봤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니까요. 꼭 내가 그런 물건을 만들 게 아니더라도, 그런 물건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뭔가를 하고 싶다면 수업료를 아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가장 최근에 낸 수업료는요?

핫프레스 머신이요.(웃음) ‘불박기’라고도 하는데, 글자가 양각된 폰트를 뜨겁게 달궈 가죽 같은 데 문구를 각인하는 도구예요. 이게 또 완전 개미 지옥인 게, 쓰고 싶은 서체가 있으면 거기 해당하는 폰트 한 세트를 다 사야 해요. 그것도 엄청나게 다양한 크기 중 딱 하나만 골라서요. 이게 한 세트에 30만~40만원 정도 하거든요. 요즘 직구로 폰트 사는 재미에 빠져, 일주일에 한 폰트만 사자고 스스로 자제하고 있는 중이에요.

 

일주일에 하나도 많은 거 아니에요?(웃음)

그렇죠. 그래도 다행히 저는 어떤 영역이든 빨리 경험하고 빨리 빠져나오는 편이에요.

 

빨리 빠져나오는 비결은요?

많은 수업료?(웃음) 저는 어떤 물건이 가지고 싶으면 그 물건의 끝판왕을 먼저 사요. 이제 막 골프에 입문했다 치면 실력은 제로여도 일단 장비발부터 세우는 거죠. 그렇게 이런저런 도구를 쓰다 보면 ‘아, 이게 왜 좋은지 알겠다’ 하는 감이 와요. 그러고 나면 대부분 자연스럽게 관심이 떨어지더라고요.

 

문구 덕후들의 천국, ‘포인트오브뷰’.


소문난 문구 덕후이기도 하죠. ‘포인트오브뷰’에 처음 방문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해요. ‘우리나라에 이런 프리미엄 문구점이 생기다니!’ 하고 감탄했죠.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구점은 들어서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공간이에요. ‘어떡하지? 어디서부터 봐야 하지?’ 하고 마음이 막 바빠지는 그런 곳이요. 다행히 제가 뭔가를 분석하는 걸 좋아해요. 문구도 좋아하지만 문방구나 백화점 같은 리테일에도 관심이 많아요. 안 그랬으면 그냥 예쁜 문구를 사 모으는 수준에 그쳤을 거예요. 지금은 어떻게 하면 이걸 브랜드로 풀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뭘 하든 ‘이게 될까?’라는 걱정은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나에게 재미있으면 남들에게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고, 안 되면 방법을 바꾸면 되고, 그래도 안 되면 그만두고요. 게다가 요즘은 인스타그램의 시대잖아요. 특히 ‘오르에르’는 그 덕을 많이 봤죠. 인스타그램, 사랑해요.(웃음)

 

총괄 디렉터로 참여한 ‘LCDC 서울’ 이야기를 해볼까요? 오르에르 때도 느낀 거지만 벽에 걸린 액자 프레임 하나, 화장실에 깔린 타일 하나에서 전해지는 디테일의 힘이 정말 대단해요.

저는 ‘숨겨놓는다’라는 표현을 자주 써요. 마치 보물찾기하듯, 알아볼 수 있는 사람만 알아보는 디테일을 곳곳에 숨겨놓는 거죠. 예를 들어 1층 화장실의 경우 제가 예전에 모았던 ‘이페메라(우표, 티켓, 메모지 같은 종이들)’를 이용해 성별 표시를 했어요. 그걸 저희가 대놓고 자랑하면 재미없어요. 그렇지만 누군가 ‘어? 여기까지 신경 썼네?’ 하고 알아봐주는 순간 그 사람과 브랜드 사이에 결속력이 생기죠. 이런 작은 부분이 모이고 모여 팬덤이 만들어지기도 하고요.

 

완벽주의자처럼 보이는데, 기획 과정에서 타협하기도 하나요?

그럼요. 특히 LCDC 서울처럼 클라이언트(SJ그룹)가 있는 프로젝트는 사실상 모든 게 타협의 산물이에요. ‘얼마나 적절한 포인트에서 타협의 강약을 잘 조절하느냐’가 핵심이죠. 다행히 저희는 브랜드를 오랫동안 운영해왔기 때문에 그 타협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어요. 예를 들어 명함을 외주로 맡겼는데 디자인 업체에서 한 장에 3천원짜리 시안을 가져왔다고 쳐요. 결과물이야 예쁘겠지만 5천원짜리 커피를 파는 가게에 그런 명함을 둘 수는 없잖아요. 지속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런 타협을 거의 2년 내내 했죠.

 

대표님이 기획한 공간들을 보면 동시대 트렌드보다는 클래식에 기반을 둔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대표님은 ‘트렌드’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요?

트렌드… 잘 모르는 것 같아요.(웃음) 트렌드를 따라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요즘 어떤 게 유행인지 분석하는 걸 더 좋아해요. ‘요즘 왜 갑자기 이런 카페가 유행이지?’, ‘요즘 어떤 브랜드가 잘된다던데 대체 무슨 매력이 있는 거지?’ 하고 고민하는 게 좋아요. 이런 현상을 잘 살펴보면 시대의 흐름과 인문학적 맥락이 모두 녹아 있거든요.


 

LCDC 서울을 기획할 때도 그런 마음이었나요?

네, 저는 트렌드보다 제가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을 더 우선하는 편이에요. 새로 문을 열었지만 어쩐지 옛날부터 여기 있었던 것 같은 그런 공간이요.

 

서울에서는 공간이 패션처럼 빠르게 소비되죠. 가오픈 때 반짝 인기를 얻었던 공간이 금세 철 지난 핫플이 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LCDC 서울을 기획할 때 요즘 유행하는 요소를 모두 배제했어요. 요즘 트렌디하다는 카페들 보면 하얀 공간에 포스터 한 장 툭 붙어 있고, 등받이 없는 의자 옆에 야자수 화분 몇 개 놓여 있고 그렇잖아요. 제 또래 친구들이랑 그런 데 가면 오래 못 앉아 있겠더라고요. 서울의 공간은 왜 다 20대를 위한 공간이어야 하나,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정작 돈을 가장 잘 쓰는 건 40대인데, 30~40대들이 편안해하는 동시에 20대들도 동경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은 없을까 고민했죠.

 

‘아틀리에 에크리튜’는 비주얼 이전에 텍스트로 공간을 기획한다고 들었어요. LCDC 서울을 기획할 때 중심이 된 텍스트는 무엇이었나요?

‘이야기 속의 이야기’요. 2층에 있는 의류 편집 매장 ‘르콩트 드콩트(Le Conte des Contes)’를 기획하다 생각한 개념인데, 나중에는 LCDC 서울의 모든 공간에 대전제로 적용했죠.

 

기획 단계에서 아이디어를 공유할 때 텍스트가 비주얼보다 유리한 점은요?

비주얼을 앞세우면 콘셉트가 시각적으로 고정되기 쉬워요. 텍스트는 그렇지 않죠. 한 권의 책을 읽고 각자의 감상을 나누면 똑같은 문장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잖아요. 처음부터 특정 이미지를 정해놓고 일을 시작하는 것과 나는 나대로 생각하고 너는 너대로 생각한 것을 서로 모아 함께 발전시키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예요.

 

정돈된 복도에 6개의 셀렉트 숍이 마주한 3층 ‘도어스’야말로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콘셉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죠.

사실 가게들 문을 떼면 백화점과 똑같은 구조예요. 낭비되는 공간이 많아 상업 건물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구조인데, 제가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거기서 문이 열리면 또 다른 문이 펼쳐지는 장면에 영감을 받아 기획했어요.

 

복합 공간에서 자체 브랜드를 중심에 둘 경우 나머지는 말 그대로 공간을 ‘채우는’ 들러리에 머물기 쉬운데, LCDC 서울은 자체 브랜드와 입점 브랜드가 공간을 평등하게 공유한다는 인상을 줘요.

그게 중앙 계단을 만든 이유기도 해요. 1층 이상의 리테일 공간이 갖는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가 1층 위로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중앙 계단을 만들고, 꼭대기인 3층에는 보는 순간 호기심이 솟아나는 개미지옥 같은 공간을 만들었어요.(웃음) 


헤어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 LCDC 서울.


여가 시간에는 뭘 하나요?

대부분 덕질이에요.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빨리 집에 가서 덕질해야지’ 이 생각밖에 없어요. 그럴 때 약속 있으면 약간 침울해지기도 하고요

 

비즈니스하는 입장에서는 좀 불리한 성향 아닌가요?

맞아요. 그냥 이유 없이 사람들한테 막 연락도 하고 DM도 보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얼마 전에 일본 잡지를 보는데 어떤 만화가가 자기는 1년에 세 번 집을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슈퍼 두 번, 동물병원 한 번. 그거 보면서 다음 세상에는 만화가로 태어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이번 인터뷰는 ‘세계 여성의 날’ 특집 일환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성 간의 연대에 대해 자유롭게 말씀해준다면요.

인터뷰 전에 이 질문 받고 한참 고민했어요. 사실 저는 제가 여성이라는 생각을 별로 안 하고 살거든요. 나와 내 관심사, 2가지만 있어도 너무 행복한 사람이라 사회적으로 뭔가를 발언하거나 대외적으로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즘 라이프스타일 신을 이끄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이라는 거요. 요즘 저희끼리 만나면 “여자들이 참 잘해” 이런 얘기 많이 하거든요. 뭐랄까, 따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 자연스럽게 응원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우리가 잘 버티고 있다는 연대, 그걸 실감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맞아요. 특히 코로나 시대에 여자들은 출산, 육아 등으로 서로 단절되기 쉽죠.

이럴 때일수록 서로에게 뭔가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게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같아요. 서로 멋있다, 멋있다 격려하면서 힘도 받고요. 업계 대표님들끼리 모이면 정말 어벤져스가 따로 없어요. 20~30대 젊은 친구들이 자기 브랜드 시작하는 거 보면 옆에서 막 응원해주고 싶고요. 그렇게 연결고리가 늘어나는 게 뿌듯해요. 물론 저는 그래도 저 자신과 노는 걸 제일 좋아하지만요.(웃음)


Editor 강보라

Photo 장수인/ 아틀리에 에크리튜(자료 사진)

Assistant 김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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